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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제문제] 법과 선(善)의 관계

작성자 : 최고관리자

Date : 2013-03-20 21:10 | Hit : 1,677

법과 선(善)의 관계

들뢰즈는 근대적인 의미의 법 개념의 정립을 칸트로부터 찾는다. 칸트의 사고 방식의 혁명은 인식론뿐 아니라 법의 영역에서도 일어났는데, 바로 고대 그리스 이래의 법과 선의 관계의 전도가 그것이다. 플라톤 이래의 법과 선의 고전적인 관계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들뢰즈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법에 대한 하나의 고전적인 이미지가 있다. 플라톤은 그 이미지를 완성했으며, 장차 그것은 기독교 세계에서 인정될 것이다.(중략) 법은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법은 부차적인 것, 선의 대리자에 불과하다. 즉 법은 선이라는 최상 원리에 의존하고 있다. 선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면, 그리고 어떻게 선에 순응하는지를 알았다면 인간에게는 법이 필요없었을 것이다. 법은 선이 떠나버린 세계에서의 선의 대리자일 뿐이다. 그 결과(중략) 법에 복종하는 것이 ‘최선’이며, 최선은 선의 이미지이다.”
법과 선의 고전적인 관계에 있어서 법이란 선에 비해 부차적인 것, 혹은 선을 닮기 위해 우리가 취하는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법은 그저 ‘이차적인 수단’, 신들이 버린 세계 속에 있는 선의 유사물”이며, 신들의 “진정한 정치가 부재할 경우, 인간이 그에 의존해 스스로를 인도해야 하는 일반적인 명령” “말하자면 최상의 원리인 선의 모조품”일 뿐이다. 즉 최고 선 혹은 플라톤식으로 표현하면 ‘선의 이데아’를 따르기 위해 그것을 모방하는 것이 현상계의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며, 구체적으로 이 모방은 바로 선의 모조품인 법을 따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법은 법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것(선)에 대한 인식을 제공할 때만, 그리고 ‘최선’의 형태를 규정해줄 때만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근대 세계에 와서는 이러한 선과 법의 주종 관계는 정반대로 뒤바뀌는데, 들뢰즈에 따르면 그런 혁명의 실마리는 칸트의 『실청 이성 비판』이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칸트의 『실천 이성 비판』에서 준엄한 언명을 찾을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그의 방법의 새로움이란 법은 더 이상 선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선 자체가 법에 의존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법은, 법의 옳고 그름을 좌우하는 어떤 상위의 원리에 근거하지 않고, 할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법은 그 자체를 통해 타당성을 획득하며 그 자체에 근거함을 의미한다. (중략) 고전적인 이미지는 선의 영역들에 따라, 그리고 최선의 상황들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특수화된 법들 외에는 알지 못했다.(중략) 칸트의 도덕법은 순수 형식의 표상이며, 내용이나 대상이나 지역, 상황들과는 무관한 것이다. 도덕법은 (중략)법의 형식이며, 그것을 근거 지을 수 있는 모든 상위의 원리를 배제한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법의 고전적 이미지에서 벗어나서 우리에게 근대적인 법 이미지를 제공해준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선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따라서 이차적인 지위에 머물고 있던 법, 선의 원리를 통해서만 그 존립이 근거 지어지던 법이 어떻게 칸트에 와서는 별도의 최상의 원리에 의존하지 않고 저 스스로 근거지어질 수 있게 되었는가? 이는 칸트가 인식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행위의 영역에서도 사고방식의 변혁을 꾀했기에 가능했다. 『순수 이성 비판』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사고가 대상의 성질에 준거한다는 종래의 생각을 전도시켜 대상이 사고의 주위를 맴돌게 하고서 인식의 문제를 풀어보려는 기획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법이 선의 주위를 맴도는 것이 아니라 “선이 법의 주위를 맴돌게 한 『실천 이성 비판』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확실히 더욱 중대하다”고 평가한다. 칸트 이전에는 윤리성은 행복, 신의 의지 등에서 찾을 수 있었다. 법(예컨대, 살인하지 말라)은 행복, 신의 의지 등 법의 상위에 자리 잡고 있는 선을 추구할 때만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각양각생으로 저마다 선을 모사한다고 자처하는 법들의 객관적 타당성이 확보될 수 없었기에 오히려 칸트는 거꾸로 주체의 심성 안에 있는 보편적 형식으로서의 법에 근거하여 선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제 칸트와 더불어 “인식의 대상이 주체(나) 주위를 공전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선은 주체의 법 주위를 공전한다.”
선에 의해 근거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을 근거 짓는 칸트의 절대적인 법, 바로 정언명법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겠다. “도덕법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말해주지 않고, 우리의 행위가 어떤 것이든 간에 우리가 순응해야 하는(주관적)규칙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종래에는 특정 내용으로 된 준칙,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같은 것은 그것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보다 상위에 있는 ‘선’을 통해 근거 지어졌었다. 즉 어떤 준칙을 따랐을 경우 선에 부합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준칙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이었다. 이와 달리 칸트의 정언명법에는 살인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등 우리의 구체적인 행위를 지시해주는 내용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이런 의미에서 이 법은 속이 텅 비어 있다). 오직 우리의 행위가 순응해야 하는 형식적 규칙으로서의 법만이 제시된다. 예를 들자면 그 법은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인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와 같은 언명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 법은 어떤 행위가 모순 없이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면 그 행위는 선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가령 ‘거짓말은 해도 된다’는 준칙은 형식적인 면에서 모순 없이 보편적으로 생각될 수 없다. 왜냐하면 ‘거짓말은 해도 된다’는 것을 모두가 따라야 하는 보편적인 준칙이라고 할 때, 이 준칙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함축하며, 적어도 그것을 믿고 다른 사람에게 이것을 준칙으로 제시함에 있어서 그 사람들은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거짓말은 법의 형식, 곧 법들의 법인 정언명법에 위배되며, 따라서 선한 행위를 표현하고 있지 못하다. 선하게 살기 위해 따라야 하는 준칙은 이 무조건적인 정언명법에 부합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런 뜻에서 이 무조건적인 법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선이다. 선을 따르기 위해 법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법에 복종하는 것이 곧 선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근대 세계에 들어와서 칸트를 통해 법과 선의 주종 관계는 전도된다. “법은 더 이상 이미 존재해 있는 선에 의존하지 않는다.(중략) 법은 순수 형식이며 〔오히려〕선이 이 형식에 의존한다.” “법으로부터 선이 도출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들뢰즈는 고대 그리스적 법 개념으로부터 칸트적인 법 개념으로의 이러한 이행을 “기독교 서계 저편의 유대교적 교리로의 복귀”라고 표현한다. 후에 자세히 보게 되겠지만, 칸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법의 절대성은 율법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유대교의 특징과 어떤 점에서 일맥 상통하는 면이 있다.